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잉카 제국 (문단 편집) == 군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guerreros-incas.jpg|height=24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280px-Realistic_Inca_army.jpg|height=240]]}}} || 잉카 제국의 군대는 수많은 민족과 부족들이 모여 만들어진 혼성 군대였다. [[우아이나 카팍]] 황제 시기에 규모 면에서 절정을 찍으면서 이때는 정규군으로만 무려 20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운용하기도 했다. 병사들은 모집병이나 징집병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징집된 경우에는 국가에서 고향의 가족들에게 식량과 의복 등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대주었다. 때문에 잉카 제국에서는 몸이 좋고 무술이 뛰어나다면 집에 묶여 농사를 짓기보다는 차라리 군대에 말뚝을 박는 것이 썩 나쁜 선택이 아니었고, 오히려 사회 피라미드 내에서 위로 올라갈 수 있었던 몇 안되는 사다리들 중 하나였기에 패기 넘치는 청년들이 다수 군대에 자원하고는 했다. 참고로 군의 장교들은 젊은이들이 모여 스스로를 증명하는 행사였던 '와라치쿠이' 축제에서 뽑혔다. 이 축제에서 장교 지원자들은 격투술이나 리더십, 지휘 능력 등 기본적인 장교로서의 소양은 물론, 얼마나 오랫동안 깨어있을 수 있는가 등 다양한 면에서 시험을 받았다.[* 어떤 사람은 1주일 동안 자지 않고 버틴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중 훌륭한 성과를 낸 남자들만이 장교로 임관할 수 있었고, 실력이 매우 좋은 사람들은 특별히 황제의 근위대로 뽑혀가기도 했다. 잉카의 군대 모집력은 꽤나 좋은 편이었다. 농사와 제사처럼 기본적인 의식주를 공동체 내에서 해결했던 잉카 사회에서는 '미타'라고 불리는 사회 공동체를 만들어 생활했고, 군병들을 모집할 때도 이 미타를 기준으로 젊은 남성들을 데리고 갔다. 잉카 정부는 시민들에게 약 6~7년 정도의 [[병역의 의무]]를 지웠고, 대략 25세에서 50세 사이의 남성들이 주요 징집 대상이었다. 고산 지대의 마을에서는 이 병역을 이행하는 것이 사회적 명예이자 신분 상승의 기회로 여겨졌고, 특히 귀족들의 경우 병역을 이행하지 않는 것에 대해 굉장히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어쨌든 이렇게 모은 징집군들을 케추아어로 '''와카 카마유크'''라고 한다. 와카 카마유크는 투석부대, 투창부대, 그외의 일반 보병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이들 중 투석부대는 케추아어로 '''와라카'''라고 불렸다. 와라카들이 사용했던 [[투석구]]인 [[볼라]]는 위력이 굉장히 강했는데, 상태가 좋지 않은 철제검을 두동강내버릴 정도라고 전해진다.[* 에스파냐인 병사들이 이 무기로 큰 피해를 입었다. 망코의 봉기 당시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동생인 후안도 이 무기에 의해 전사했다.][* 훗날 잉카 부흥 운동을 이끌었던 투팍 아마루가 이끌던 부흥군도 상당수가 투석구로 무장했다. 상가라라 전투 당시 800여명의 부흥군이 교회 안에서 농성을 하면서 투석구로 토벌하러 온 스페인 전열보병 900명을 거의 전멸로 몰아넣었다. 당시 스페인군 전사자는 무려 578명에 달했다. 그에 반해 부흥군의 사상자는 고작 30여명이었다.] 한편 투창부대는 [[아틀라틀]]과 유사한 투창기를 사용했다. 이들 중에는 '''아이유스'''라는 [[볼라]]로 무장한 병사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 기병 부대였고, 볼라로 기수나 말을 넘어뜨릴 수 있었다고 한다. 일반 보병 대부분은 '촌타'라는 나무로 만들어진 나무곤봉으로 무장했으며 돌도끼나 나무곤봉에 날카로운 청동을 두른 둔기로 무장한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모인 병사들은 지방의 유력자들인 '쿠라카'들이 명목상의 총사령관을 맡았고, 전장에서의 야전 지휘관들은 충분한 능력을 갖춘 장교들이 맡았다. 잉카 군대가 전장에서 사용했던 전술은 대략 이렇다. 먼저 전투가 개시되면, 일단 소리를 질러 적들의 기세를 꺾은 다음 요란한 음악과 춤을 추면서 아군의 전의를 붇돋았다. 병사들은 열과 줄을 정확히 맞추어 서있었고, 대체적으로 침묵할 것을 요구받았다. 이들이 소리를 지를 때는 오직 전투 개시 직후에 적들에게 고함을 지를 때 뿐이었다. 보통 전선의 맨 앞줄에는 [[투석구]]를 사용하는 병사들과 투창병, 궁병처럼 상대적으로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병사들이 자리했고, 이들은 전투 초반에 최대한 적에게 피해를 많이 입히는 것이 목표였다. 이후 적과 아군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져 근접전이 예상되면 이들은 곧바로 뒤로 빠졌고, 그 뒤에 버티고 있던 도끼와 장창 등으로 중무장한 병사들이 난전을 벌였다. 난전을 벌이기 시작하면 군대는 크게 3갈래로 나뉘어 중앙의 군대는 적들의 공격을 막아냈고, 나머지 2갈래의 병사들이 뒤로 우회하여 적들의 측면을 찔렀다. 참고로 이같은 전법이 거의 언제나 먹혔던 이유는 잉카 군대의 '''압도적인 물량'''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시 남미 지방에는 더이상 잉카와 같은 대제국을 상대할만한 세력이 남아있지 않았고, 그랬기에 잉카의 대군과 맞붙으면 거의 항상 잉카의 승리로 끝났다. 황제 등 고위급 사령관들은 뒤에서 전투의 형세를 지켜보았고, 간혹 눈에 띌 정도로 용맹한 병사가 있으면 전투가 끝나고 그에게 훈장을 내려주기도 했다. 잉카 군대는 언제나 엄청난 수의 민간인들을 함께 데리고 다녔다. 대부분이 병사들의 아내나 가족들이었는데, 주로 남편의 옷을 손질해주거나 음식을 만드는 역할을 맡았다. 전투가 끝난 후에는 병사들을 구조하고 상처를 치료하고 시신들을 수습하는 등 전형적인 비전투인력의 모습을 보였다. 참고로 잉카 군대는 절대로 밤에 싸우지 않았다. 이유는 밤에 전투를 벌이면 태양신 인티의 가호를 받지 못해서. 잉카 군대는 종교적인 이유로 사제들도 함께 모시고 다녔고, 이 종군사제들은 주로 신에게 제물을 바쳐 승리를 기원하거나 적들에게 저주를 퍼부어 병사들의 심리상태를 안정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또한 물자 수송이나 무기 운송의 경우 [[라마]]를 주로 활용했다. 잉카 군대에서는 궁수를 거의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잉카인들이 살았던 지역은 나무가 부족하고 돌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실 [[화살]]도 지금으로 치면 총알과 같은 소모가 굉장히 심한 무기라서 나무가 부족한 지역에서는 만들어 사용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잉카인들은 구하기 어려운 나무를 이용해 만드는 화살 대신에 자신들의 땅에서 쉽게 구할 수 있고 비용이 전혀 들지 않는 돌을 던지는 [[투석]]에 능숙했다.] 궁수들은 안티스([[아마존 강]] 유역 원주민)에서 지원받은 부대로, 극소수였다. 하지만 궁수와 같은 사격 병력이 소수에 불과하니 스페인 군인들한테 큰 피해를 입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물론 잉카 군대 역시 돌팔매 부대처럼 원거리 공격에 특화된 부대가 있기는 했지만, 이 투석구라는 것이 활이나 총보다는 그 정확성이 지나칠 정도로 떨어졌고 말그대로 짱돌을 던지는 것이다보니 그 살상력도 스페인 병사들이 가지고 있던 총기류와 비할바가 되지 못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incaarmy.jpg|height=24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incawarrior.jpg|height=24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thelosttreasurechest.files.wordpress.com/warriors-of-the-inca-empire.jpg|height=24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inca-warrior-with-ax.jpg|height=240]]}}} || 잉카 군대가 타 선아메리카 문명의 군대와 확연히 달랐던 점은 지휘체계가 굉장히 일사불란했다는 점이었다. [[고대 로마]]처럼 잉카 역시 10인장, 50인장, 백인장, 오백인장, 천인장, 만인장까지 지휘할 수 있는 병사의 수들에 따라서 장교의 계급이 나뉘었다. 잉카 군대에서 장교들 중 가장 계급이 낮았던 십인장은 10명의 병사들을 지휘할 수 있었고, '''춘카 카마유크'''라고 불렸다. 굳이 현대식 계급으로 따지면 [[중위]] 정도에 해당한다. 그다음으로 50인장은 '''피시카 춘카 카마유크'''라고 불렸고, 현대의 [[대위]]에 해당했다. 백인장인 '''파치크 카마유크'''는 현대의 [[소령]] 정도였고, 500인장인 '''피시카 파치크 카마유크'''는 [[중령]] 정도였다. 천인장인 '''와란카 카마유크'''는 [[대령]]이었고, 오천인장인 '''피시카 와란카 카마유크'''는 [[준장]]이었으며 만인장인 '''우누'''는 [[소장(계급)|소장]]부터 시작해서 [[대장(계급)|대장]]까지에 해당하는 고위 계급이었다. 마지막 [[대원수]]에 해당하는 계급인 '''아푸키스페이'''는 군대의 총사령관이었으며, 지휘할 수 있는 병사들의 수에 한계가 없었고, 대부분 황제가 맡았다. 잉카의 군인들은 당시 남미의 병사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발달된 장비를 사용했다. '야퀼라'라고 불리는 두꺼운 [[알파카]] 털로 만들어진 망토를 둘렀으며, 이 망토는 워낙 두꺼워서 전투 도중 가벼운 화살이나 심지어는 가벼운 총탄까지도 막을 수 있었다. 또한 장교들의 경우에는 두꺼운 솜으로 만들어진 체크무늬의 흉갑을 둘러 가슴 부분을 보호했으며, 목판을 붙여서 보강하기도 했다. 황제나 최고위 장군들은 전장에서 구분을 위해서 흉갑에 황금으로 장식을 했다. '우마 추쿠'라고 불리는 [[투구]]를 쓰고 다니기도 했고, 이 투구에 깃털이나 목재를 덧붙여서 보강했다. 한편 주요 방어구였던 방패는 두꺼운 목재로 만들어 가죽으로 위를 덮어 만들었고, 방패 아래쪽에는 가죽으로 치렁치렁하게 띠를 늘어뜨려서 다리 부분까지 가볍게 방어할 수 있도록 했다. 주된 형태는 직사각형이나 사각형, 원형 모양이었으며 체크무늬나 줄무늬를 넣어서 장식했다. 한편 무기도 다양하게 사용했다. 주 무기는 '치크타나'라고 불리는 [[도끼]]로, 잉카 제국 전역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가장 흔한 무기였다. 도끼 다음으로 흔하게 사용되던 무기가 [[볼라]]라고 부르는 돌을 줄에 묶어 휘두르는 무기였다. 대략 3개에서 4개의 돌들을 줄에 묶어서 휘둘렀으며, 공격 범위가 상당히 넓었기에 잉카 제국에서 주된 무기였다. 짱돌치고는 꽤나 위력도 강하고 잘만 던지면 녹슨 칼도 부술 정도로 강력했기에 그나마 스페인 군대에 맞서 싸울 때에 위력을 발휘한 무기들 중 하나였다고 한다. 활도 있기는 있었다. '와키나'와 '와키'라고 불렀으며, 잉카 군대의 주력 병종은 아니었고 지방 소왕국에서 올라온 병사들이 간간히 사용하는 정도였다. '와크타나'라고 하는 나무 곤봉도 자주 썼다. 기다란 목재 곤봉으로 돌조각이나 청동 조각을 박아 살상력을 극대화했으며, 전장에서는 워낙 무거웠기에 두 손으로 사용해야만 했던 양손무기였다. 다만 그 무게 때문에 전사들이 애용하지는 않았고, 주로 과시용으로 썼다. 잉카 보병들이 야전에서 가장 많이 쓰던 무기는 '참피'라고 부르는 [[메이스]]였다. 별모양의 뾰족뾰족한 금속을 막대기 끝에 달아 사용했다. 한편 활이 없었으니 대신에 투석구를 사용했는데, 이 투석구를 다루는 군인들을 '''후아라카'''라고 불렀으며 어릴 때부터 특수 교육을 시켜 만들어낸 특수 병종이었다. 잘만 던지면 시속 120km에까지 달하는 속력으로 돌을 던질 수 있었다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